公의 姓은 印氏요、이름은 鍾九、호는 梧齋이니 喬桐人이니 至聖殿講師이셨다. 中始祖 ‘璫’께서는 공민왕 甲午년에 석성부원군 첨의평리사 동지밀직사사릍 지내신바 公의 二十一世祖요、二代 내려와 元寶에서 洪州牧使와 知州事 형조판서 咸山君이 되었고 十一世 내려와서는 玞이시니 同知中樞府事를 지내셨다. 公의 조부는 榮源이시니 호는 三山으로 경릉참봉을 지내고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資憲大夫工曹判書 崇禎大夫中樞院府事의 증직을 받으셨고 어머니는 贈貞敬夫人星州裵氏로 내외분께서 모두 孝行이 있어서 夫婦 雙孝閣을 나라에서 받으셨다. 아버지는 熙培이시니 호는 槐堂으로 순릉참봉을 거쳐 通訓大夫中樞院議이었고 어머니는 淑人 順興安氏시다. 큰兄 鍾曙는 至聖殿博士로서 孝行이 고향에서 일렀다. 公께서는 高宗 丙申正月二日生으로 天性이 효도와 우애가 남달랐고 또 學問을 좋아하사 항상 同志들과 함께 時局을 講論하매 慨然히 맑은 志氣를 發하시었다. 일찍이 여러 英才들을 불러 모아 놓고 講師로서 多年間 학술강습회를 개최하여 五倫三綱을 훈육하였으니 그 사적이 지금 大成文藝京約所 보존기록(靑衿議案)에 남아 있어서 남의 칭송을 받고 있다. 그리고 丙子譜(一 九三六년—第五回譜) 편찬에 공로가 있으신바 이때 公께서 쓰신 跋文(편집후기)이 世譜에 실려져 전해오고 있다. 丙子年五月四日에 별세하시니 享年이 四十一세요、묘는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가미산 후록 辰坐이며 부인 文化柳氏는 章烈의 따님으로 戊戌十月二十九日生인바 天性이 정숙하셔서 남들이 칭송하였는바 경신년 十二월二十八일 별세한바 묘는 같은 좌향 쌍분이다. 公께서 二男二女를 두시니 장남은 光洙 차남은 璟洙요 따님은 車同俊、裵徹喜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光洙는 성주배씨와 결혼하여 一 男四女를 둔바 장남은 成桓이요、딸은 崔正泰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딸은 아직 未婚이다. 차남 璟洙는 全州李氏와 결혼하여 二男四女를 두었으니 장남 寶植、차남 雄植이요、장녀 朴順道에게 출가하였고 그 외 딸들은 아직 미혼이다. 成桓은 동래정씨와 결혼하여 二男을 낳으니 世英과 世準이다. 이상이 모두 公의 아들、손자、증손인바 그 외는 모두 기록치 않는다. 공의 아들 光洙가 비문을 청해온 바 내가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그 위선지성에 감복되어 감히 사양치 못하고 족보에 의하여 대략 右와 같이 비문을 쓰고 끝으로 墓碑銘에 적노니 “公의 천성은 효도와 우애였고 또 공손하고 검소하며 온화하고 어질어라. 여러 英才들을 모아 오륜삼강을 교육시켰음은 서울 성균관 향교 기록에 남아있고 서적에서 찬양하네. 인씨 世譜를 편찬하여 편집후기를 쓴 글이 빛나고 있네. 가미산 기슭에 고이 잠들었으니 錦馬川의 물이 깊고도 푸른 듯하여 五溪로 그 물길마저 길이 뻗쳐가네. 또 자손들마저 잘 이어가서 앞으로 永世에 길이 昌盛하겠구려” 一九七四年 甲寅 十二月 상순 청주后人 진사 淸堂 李琮壽 삼가 짓고 또 글씨까지 쓰다